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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스타코비치에 대한 글

 

쇼스타코비치 : 시대를 넘어 불행한 작곡가


불행한 작곡가 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Shostakovich, Dmitri Dmitriyevich : Дмитрий Дмитриевич Шостакович : 1905-1975)는 참으로 불행한 작곡가이다. 쇼스타코비치가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살았던 생애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현재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된 시점, 바로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 불행하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참으로 뚱딴지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쇼스타코비치는 살아 생전보다 오히려 죽고 나서가 더 불행한 작곡가인지도 모르겠다. 쇼스타코비치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필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의아해 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럼 지금부터 이런 뚱딴지같은 이야기를 꺼내게 된 이유를 말해 보고자 한다.

사실 쇼스타코비치라는 작곡가의 삶 자체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음은 인터넷에서 조금만 검색을 해보면 다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본 쇼스타코비치는 언제나처럼 당성이라는 이데올로기와 음악이라는 예술 사이에서 갈등한 작곡가, 또는 당의 비판으로부터 외줄타기를 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지켜온 작곡가로 그려지고 있다. 이 말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며, 작곡가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에 꼭 필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해석이 비록 틀린 말은 아닐지라도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해석의 틀을 가두어 두고 있는 문제점을 일으킨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선 우리가 가장 대중적으로 친숙하게 접할 수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곡이라고 한다면 단연코 그가 작곡한 재즈 모음곡 2번의 두 번째 왈츠일 것이다. 이 곡은 '번지 점프를 하다' 등과 같은 우리나라의 영화뿐 아니라,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유작인 '아이즈 와이드 샷'에도 삽입되었고, 최근에는 국악기인 해금 연주로 편곡되기도 한 친숙한 곡이다. 약간 우울한 정서를 포함하고 있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그의 간략한 전기를 담은 글들을 읽다 보면 어느새 그 곡은 고뇌하고 있는 한 예술가의 슬픔이 묻어있는 곡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들은 어떤 이데올로기와 연관을 짓지 않고서는 설명되어 있지를 않다. 표제가 붙어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처음과 마지막 교향곡인 1번과 15번이 비교적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울 뿐, 하나같이 '혁명', '전쟁' 등과 같은 굵직한 주제들이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순음악적 기호들로 가득 차있는 현악사중주조차도 쇼스타코비치가 남겨놓은 음악적 암호들(예를 들면 그의 이니셜로 음악을 만들어낸 DSCH 코드와 같은 것을 들 수 있겠다.)을 찾아내는 데에 더 중점을 둔 사람들도 있다.

작곡가라고 한다면, 아니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어느 정도 정형화된 이미지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렇듯 쇼스타코비치에게서처럼 어떤 정치적 해석과 관련하여, 또는 그 시대 상황과 관련하여 연관짓지 않고서는 설명해 낼 수가 없는 코드들이 확고한 작곡가는 드물다. 이런 코드들은 결국 쇼스타코비치로 하여금 더 이상 새로운 해석보다는 기존에 있는 해석에 대해 가두어져 지내게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작곡가를 다양성을 중시하는 이 사회에서 어찌 불행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붉은 색의 쇼스타코비치

그렇다면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위에서 언급한 그런 코드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먼저 쇼스타코비치 하면 떠오르는 색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듯하다. 언젠가 클래식 음악을 다루는 커뮤니티에서 작곡가와 색상에 대한 이미지를 이야기하면서 쇼스타코비치도 잠시 언급이 되었었는데, 하나같이 이 작곡가에 대해선 붉은 색의 이미지를 말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들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쇼스타코비치라는 이름을 타이틀로 한 음반들이 출시가 되면 거의 붉은 색을 주조로 한 음반 표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작곡가의 음반들을 펼쳐 놓고서 이렇게 한 가지 색상이 주를 이루는 작곡가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쇼스타코비치는 붉은 색의 음반이 주를 이룬다. 재발매된 음반을 제외하고서 음반들을 조사해 보면 거의 1/4에 해당하는 음반이 붉은 색을 주 색상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어떤 작곡가에게서 이런 상황을 찾아볼 수 있을까? 다른 작곡가들에게서는 특정한 색깔이 주를 이루지 않을 뿐더러 붉은 색이 주는 강렬함 때문인지 바탕 전체에 붉은 색을 띠는 음반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런 까닭에서였는지 최근 부다페스트 사중주단 연주의 하이든 현악사중주가 붉은 색을 바탕으로 한 음반 박스세트로 재출시 되었는데, 이를 쇼스타코비치 현악사중주 전집으로 오인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쇼스타코비치의 음반에 이렇듯 붉은 색을 많이 사용하게 된 것은 간단하게 그가 사회주의자였고, 사회주의 사상을 내포한 작품을 많이 발표했기 때문이다. 즉 그가 가지고 있었던 이데올로기의 표현으로 붉은 색이 음반 표지에 사용되었고, 그 음반 표지로 하여금 쇼스타코비치가 붉은 색의 이미지로 각인되는 순환 고리가 연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정말 붉은 색으로 강조될 만큼 지독한 사회주의자였을까? 여기서 흥미로운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테스트해 볼 수 있는The Political Compass 에서는 쇼스타코비치의 정치적 성향을 중도적인 자유주의 좌파로 분석했다는 것이다. 이는 프로코피에프보다도 좀 더 우익적 성향이 더 강한 사람, 쇤베르크나 버르토크, 브리튼보다도 더 우익적 성향이 강한 사람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서 언급한 작곡가들 누구에게서도 붉은 색의 기조를 둔 음반 표지를 찾아볼 수는 없다. 그나마 프로코피에프의 경우 아예 '혁명'을 내걸고 발표한 작품들에서 조금씩 그 색조를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유독 쇼스타코비치에게만 왜 이렇게 붉은 색이 강조된 것일까? 이는 어떻게 보자면 상대적인 반공주의자로서의 쇼스타코비치의 모습도 강조되었기에 가능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즉 이념의 한쪽 면만이 아닌 상대적인 면에서도 이슈가 부각되었기에 그를 통한 이미지 전달이 용이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가 비록 극단적인 사회주의자는 아닐지언정 반공주의자는 더욱 아니다. 쇼스타코비치가 반공주의자라는 오해는 쇼스타코비치 사후에 서구에 출간된 솔로몬 볼코프의 저작물 '증언'이라는 작품 때문인데, 볼코프의 정치적 입장이 반영된 이 책으로 말미암아 쇼스타코비치는 사회주의 사상을 표현한 혁명적 작곡가에서 겉으로는 사회주의를 옹호한 듯했지만 속으로는 호박씨를 깐 반공주의자가 된 것이다. 물론 이 저작물은 쇼스타코비치를 오해하게끔 하는 여러 문맥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당시 스탈린 치하에서의 예술가들의 삶을 비교적 생생하게 잘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한 작품이며, 아들인 막심을 위시하여 많은 이들이 쇼스타코비치의 평소 언행과 흡사한 점이 많다고 인정되기도 했다. 그런 장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이데올로기적 관점 자체가 반공주의자의 입장에서 기술되었기에 지나치게 쇼스타코비치가 소련의 박해에 대한 무언적 반항을 했음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 오류를 지적할 수밖에 없는 저작물이기도 하다.

해외에서도 꾸며진 이야기라는 반론이 있었음에도 '증언'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논쟁의 중심에서 쇼스타코비치가 실제로 사회주의자였는지 반공주의자였는지를 소련과 미국이라는 국가를 중심으로 논쟁되기도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국내에서 이 저작물 '증언'이라는 책의 위력은 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제대로 된 번역 저작물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 '증언'을 제외하고는 없다는 점이 그런 위력을 더 대단하게 하고 있다. 결국 원서를 구해서 읽어보지 않는 한 '증언'에서 기록되어 있는 그 내용을 제외하고는 백과사전식의 내용 기술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백과사전식의 열거의 대부분은 '증언'에서 기술하고 있는 내용의 상당부분을 그대로 실어놓고 있다. 즉 당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직접적인 투쟁은 아니지만 비유적으로 투쟁을 한 작곡가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해석 자체의 다양성을 추구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를 소개하고 있는 대부분의 내용이 일반인들이 접해도 잘 이해하기 힘든 음악학적 내용을 제외하고선 '증언'에서 그려지고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이미지가 내용의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 위력은 실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곡가의 작품을 들을 때에는 사회의 억압에 대한 개인의 고뇌가 더욱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리라 판단된다. 사회주의자로서의 쇼스타코비치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데에 붉은 색을 사용될 수도 있지만, 그와는 반대편에 선 반공주의자로서의 쇼스타코비치 역시 상대적인 견지에서 붉은 색을 사용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고, 이런 붉은 색이 전체적으로 그를 이념이라는 것에서부터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부여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신경질적이고 격렬한 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있는 코드 중 또 한 가지는 신경질적인 음악을 작곡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다는 점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다소 과격하고 신경질적이기 때문에 밤에 듣기에는 힘든 음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분홍글씨'라는 영화 속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 1번이 소개되면서 일반인들로 하여금 이런 인식은 더욱 짙어진 듯하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조차도 처음에는 차이콥스키의 작품을 사용할까 하다가 클래식 음악에도 점잖은 음악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 1번을 선택했을 정도라고 하니 그런 인식은 생각보다 뿌리가 깊은 듯하다. 실제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엔 그런 요소들이 많이 존재해 있다. 느닷없이 두드려대는 타악기라든지 신경질적으로 그어대는 현악기의 활놀림이라든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서 상당히 독특한 정서로 표현되는 이런 부분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상당 부분 쇼스타코비치답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런 쇼스타코비치의 특성들을 앞서 이야기한 이념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해석하는 글들이 많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 '쇼스타코비치의 고뇌가 잘 드러났다'는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이런 과격한 면은 음악의 극적인 표현에 능했던 쇼스타코비치의 단면으로 인식한다면 좀 더 다양한 인식이 가능할 듯싶다. 쇼스타코비치가 만약 단적인 예로 그런 과격하고 신경질적인 음악만을 잘 작곡한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분명 그런 쇼스타코비치의 특성들은 앞서 언급한 해석의 틀로 쇼스타코비치를 가두어둔다고 하더라도 큰 무리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의 다양한 악상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작곡가였고, 그것을 그의 많은 작품 속에서 다양하게 표현한 작곡가였다. 즉 신경질적이고 과격한 음악은 쇼스타코비치의 한 단면일 뿐이라는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실제로 상당히 섬세하고 부드러운 면도 많이 작곡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의 2악장으로 대표되는 부드러운 선율들은 첼로 협주곡 1번을 작곡한 작곡가가 과연 이 곡을 작곡한 작곡가와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정서를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쇼스타코비치는 익살스러운 정서들도 적절하게 잘 표현하고 있는데, 1980년대 '일요일 밤의 대행진'(지금의 '일요일 일요일 밤에')이라는 코너에서 코미디언 김상호가 마임을 하면서 삽입되었던 곡이 쇼스타코비치의 발레음악 '황금시대'에 사용되었던 '폴카'였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사실 그 당시 어떻게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TV에 버젓이 사용되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아마도 그 곡이 쇼스타코비치의 곡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방송을 계속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쇼스타코비치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라고 하는 느낌의 음악뿐 아니라, 다양한 악상들을 잘 살려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작곡가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의 신경질적이고 과격한 음색은 그의 한 특징은 될 수 있을지언정 그를 규정짓는 성향은 아닌 것이다.


다양한 쇼스타코비치

앞서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의 틀들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으며, 이는 쇼스타코비치를 해석함에 있어서 어떤 도그마와 같은 형태로 굳어져 있음을 살펴보았다. 결국 필자는 쇼스타코비치를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해석하다 보면 결국 그를 그가 살았던 시대뿐 아니라 현대에서도 결국 불행한 작곡가가 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고자 함이었다.

한 작곡가에게 있어서 이토록 어떤 확정된 이미지로 굳어진 작곡가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것도 어떤 이념으로 말미암아 치장된 작곡가는 그것이 어떤 이념이 되었든지 간에 그의 음악이 다양하게 해석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없기에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쇼스타코비치에 대해서만큼은 이런 현상이 더욱 심화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서 쇼스타코비치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작곡가에게도 불행한 사실이지만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도 불행한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아들인 막심은 한 인터뷰에서 이제 아버지의 음악이 좀 더 자유롭게 순음악적으로 해석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지금, 우리는 쇼스타코비치가 남긴 음악에서 좀 더 다양한 즐거움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쇼스타코비치의 두 이미지를 비교해 보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먼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이다. 고뇌하고 진지한, 때로는 고집스러운 면도 포함되어 있는 모습 말이다. 아마도 정면으로 나와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모습과 함께 가장 많이 알려진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데, 이런 이미지가 일반인들에게 쇼스타코비치라고 하면 떠오르는 모습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여기 또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이곳에는 현재 한국 대표팀을 맡았던 아드보카트 축구 감독이 부임해 있는 제니트의 열혈 축구 팬이기도 했던 쇼스타코비치의 익살스러운 모습도 담겨 있다. 과연 어떤 것이 쇼스타코비치의 진실된 모습일까? 두 모습 모두 쇼스타코비치의 진실된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너무 한쪽 면만 치우친 해석을 강요당한 게 오늘날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그는 오늘날 살아 들려지는 그의 음악 속에서 정말 불행하다고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부록>

쇼스타코비치를 즐겁게 접할 수 있는 음반 몇 가지

1. 영화음악 : 쇼스타코비치는 평생 수많은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채플린 영화의 광적인 팬이기도 했던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을 극적으로 다루는 솜씨에 능해서 영화음악 작곡가로도 많은 활동을 했다. 물론 이는 당시 소련 체제에서 순수음악을 작곡하기 힘들었고, 자신 또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작곡행태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작곡한 영화음악의 수준을 폄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론 차이콥스키보다도 멜랑콜리한, 때로는 웅장하고, 때로는 과격하기도 한 그의 영화음악을 잘 표현한 시리즈로는 단연 Chandos에서 출시한 시나이스키 지휘의 음반들이다.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획력과 연주력 모두 만족스러운 음반이라고 하겠다.

2. 어린이를 위한 피아노 소품 : 쇼스타코비치의 아기자기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곡인데, 특히 작품69번에서는 심각함이 없고 밝고 유쾌하면서도 귀여운 쇼스타코비치를 만날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가 직접 곡목을 말하면서 연주한 Doremi 레코드사의 자작자연집을 추천할 수 있겠고, 그 외에Saison Russe 레이블에서 나온 보브릿스카야(Bobritskaya)의 음반이 좋다.


 



피아노음악 (음연) 2006년 9월호에 실린 글



내가 좋아하는 음반표지 소리



  나는 종종 음반 표지만을 보고서 음반을 구매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엔 수록곡도 구매 사유가 되긴 했지만, 동곡의 다른 음반이 있었던 관계로 만약 음반의 표지가 아름답지 못했다면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음반 표지 때문에 충동구매를 한 것인데, 나는 이런 스타일의 음반 표지가 참 좋다.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이 잘 담아져 있고, 배경 역시 조금은 쓸쓸해 보이면서도 정감이 있다.
  표지 그림을 그린 화가는 레닌이 서재에서 고민하는 그림으로 유명한 Isaak Brodsky의 그림인데, 그러고 보니 이 화가의 그림이 표지로 실린 음반이 내겐 하나 더 있는 셈이다.

  음악은 바인베르크의 초기 음악인데, 그의 특징인 유대선율이 은은하게 베어 있어서 좋았다.
  문제는 '어린이들의 공책'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면서도 이 그림의 배경처럼 참 쓸쓸하다는 점이라 하겠는데, 그래서 나는 이 음악이 더욱 좋다. 
  모두 23곡의 피아노곡인 '어린이들의 공책'은 Op.16에 8곡, Op.19에 8곡, Op.23에 7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피아니스트인 엘리자베타 블루미나는 내가 잘 아는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아이들이 가끔씩 느끼는 우울한 정서라든지 하는 것들을 피아노 선율에 잘 실은 듯하다.
  나는 이 곡의 동곡 앨범으로 한 장을 더 소장하고 있는데, 바로 피아니스트 Anatoli Sheludyakov의 앨범이다.
 

  이 연주는 앞선 연주에 비해 속도감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조금은 밝게 느껴지기도 한다.
  피아노 연주 수준을 논할 만큼의 능력은 되지 않기에 그 느낌만 이야기하자면 앞선 음반은 조금 더 섬세하고 느려서 감성적으로 들리는 반면, 뒤에 소개한 음반은 좀 더 또랑또랑하고 경쾌하다. 물론 작곡가 바인베르크만의 약간 우울한 정서는 함유하고 있지만 말이다.

  어떻게 보면 저 음반의 그림에서 풍겨져 나오는 이미지가 두 음반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Shostakovich와 Chopin Competition

  오랜만에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포스팅을 한 번 해보고자 한다.
  10년 전쯤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글들을 써대었었는데, 요즘엔 그에 대한 글을 통 쓸 수가 없었다.
  아무튼 지금 쓰고자 하는 글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포털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올라와 있는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정보 때문에 준비한 것이다.
  우선 포털에 올라와 있는 내용을 보면 이렇다.
  보시다시피 이곳에서는 쇼스타코비치가 1927년 쇼팽콩쿨에서 2위에 입상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물론 쇼스타코비치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녹음되어 있는 그의 작품들을 들어 보면 꽤 명징한 터치를 보여주고 다이나믹한 피아니즘을 선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참여했다는 1927년 제1회 쇼팽국제콩쿨에서 그는 입상을 하지 못했다. 다만 사실인 것으로 판단되지만 그가 장외에서 뛰어난 피아니스트에게 수여하는 특별상은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이 어떻게 해서 폴란드 피아니스트에게 주어졌던 2등상이 한국의 포털에서는 쇼스타코비치에게 주어져 있다. 문제는 비판적인 의식이 없는 한국의 네티즌들이 쇼스타코비치의 정보를 가져다 쓰면서 무분별하게 그가 쇼팽 콩쿨에서 2등에 입상한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포털의 태도이다. 프로필을 수정할 수 있도록 해놓고, 프로필을 수정해 달라고 요청을 했더니 정보가 부정확하다며 묵살당한 것이다.
  쇼팽국제콩쿨의 공식 홈페이지에 버젓이 2등상은 다른 사람임을 나타내는 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쇼스타코비치의 쇼팽 콩쿨 참가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가 분명히 콩쿨에 참가한 것은 분명하다. 아래에 그의 인증샷을 올려 본다.
  다시금 포털에 정보가 잘못되었음을 이야기하긴 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반영이 되어서 잘못된 정보들이 재생산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울프맨


  울프맨(The Wolfman, 2010)

  감독: 조 존스톤
  출연: 베네치오 델 토로, 안소니 홉킨스, 에밀리 블런트, 휴고 위빙


  별다른 기대도 하지 않고, 단지 '베네치오 델 토로'가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보러 간 영화였다. 나는 영화를 선택하는 주요 요인이 감독이지만 몇 명 되지 않는 배우가 영화를 보러 가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들 중 한 명이 '베네치오 델 토로'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영화에서 그가 분한 역이 '늑대인간'......
  베네치오 델 토로의 얼굴을 보라! 정말 딱이지 않은가! 따로 분장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베어나오는 저 늑대스러운 눈빛!
  영화에 대한 기대감은 그래서인지 저 멀리 있었다. 늑대인간 이야기야 뻔히 아는 이야기이고, 특수효과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트랜스포머', '아바타' 등으로 높아진 만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단지 정말 늑대스러운 베네치오 델 토로의 눈빛이 늑대인간 역을 맡으면 어떻게 될까? 라는 궁금증을 확인해 보고픈 마음밖에 없었다. 그래서 공포영화를 싫어하는 아내에게 '지킬 앤 하이드'와 같은 부류의 영화라며 살살 꼬드겨 영화를 같이 보러 가게 되었다.

  나는 우선 이 영화를 '분위기의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안개 속에 싸인 영국을 배경을 바탕으로 한 스산한 느낌의 두 배우, 베네치오 델 토로와 안소니 홉킨스의 대결을 만끽할 수 있는 영화.
  공포스러움을 나타내기 위해 전체적인 화면 처리에도 신경을 쓴 영화, 그리고 음향에서까지 공포스러움에 신경을 쓴 영화.
  그 음산하고 무서운 듯한, 그러면서도 비밀스러운 듯한 분위기를 배우들의 연기가 받쳐 주는 영화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구원의 여인,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은 어떻게 해서 지켜질 수 있는가-그것이 과연 짐승과의 차이점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라는 서양 고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를 믹서한 영화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사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아버지이자 배경이 된 마을의 늑대인간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안소니 홉킨스의 행동에 대한 설명은 그다지 친절하지 못하다. 단지 이 영화를 주인공인 베네치오 델 토로의 입장에서 봤을 때에 안소니 홉킨스는 나를 낳아주었지만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의 남자이자 내가 뛰어넘어야 할 존재로서 그려진다는 점에서 철저히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원용한 듯하다.
  구원의 여인으로서 등장한 그웬(에밀리 블런트)역 역시 인류 보편의 이야기인 '사랑'에 대한 하나의 전형이다. 원래는 형의 애인이었지만 그녀는 나의 치명적인 단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감싸주려고 한다. 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인가! 그녀의 존재는 파우스트박사를 구원한 마르그리트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자면 이 영화는 남자라는 하나의 개체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공포를 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도 여겨진다. 그렇다. '남자는 다 늑대'라고 하지 않는가!
 

의형제


  의형제 (2010, 한국)

  감독/각색: 장훈
  각본: 장민석
  출연: 송강호, 강동원 외



  장훈 감독의 첫 장편영화인 ‘영화는 영화다’를 봤을 때, 그때는 사실 장훈 감독보다는 제작과 시나리오를 썼던 김기덕이 과연 어떻게 영화를 만들었을까가 더 궁금했었다. 나의 김기덕에 대한 궁금증과 아내의 소지섭과 강지환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더해져서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었고,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도 우리 부부는 감독보다는 이야기의 중심을 김기덕과 영화를 이끌어갔던 두 배우인 소지섭과 강지환에 모았었다. 그러면서 감독에 대해서 했던 이야기는 ‘신인 감독 같은데 김기덕의 시나리오를 나름대로 충실히 반영하면서도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연출을 해내었다’는 데에 있었다. 결국 그 이야기는 감독에 대한 이야기이기보다는 대중과 잘 호흡하지 못하는 김기덕에 대한 이야기에 다름 아니었다. 결국 다시 이야기의 결론은 ‘앞으로 김기덕은 시나리오만 써야겠다’는 얘기로 귀결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화는 영화다’를 통해서 장훈 감독에 대한 인상은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이번 ‘의형제’에서 단순히 송강호와 강동원이라는 두 배우가 나오는 영화가 아닌 ‘영화는 영화다’를 만들었던 감독의 영화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고, 과연 두 번째 영화는 어떻게 나올 것인가, 라는 궁금증을 유발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비록 결말에서 조금 시시함을 내비치긴 했어도 굉장히 안정되게 진행되었고, 극의 중심에 서 있는 두 배우의 연기호흡도 무척이나 매끄러웠다. 아내는 오히려 비극적 결말이 아니고 해피엔딩이라 다행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으니 어쩌면 15세 이상 관람가라는, 가족들이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인 듯한 느낌도 있었다.
  친숙함. 어쩌면 장훈 감독의 가장 큰 장점이 이 친숙함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첫 영화의 시나리오가 관객들과 잘 호흡하지 못하는 김기덕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괴하지 않게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었고, 이번 영화에서도 긴장감 있는 극의 진행 속에서 전혀 어색하지 않은 연출력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장훈 감독의 능력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에서 무슨 거대한 철학과 교훈을 찾을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재미 그 자체를 충실하게 반영해 주고 있는 영화가 바로 ‘의형제’가 아닐까 싶다. 비록 남북이 분단된 조국의 현실에서 나올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고, 영화 속에서도 현실과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내용도 등장하지만, 그래서 일면 단순히 가벼운 영화만은 아닌 것도 같지만, 일단 이 영화는 재미적인 요소에서 그 모든 것에 대한 비판 의식을 접어두게끔 하고 극이 진행되는 과정, 즉 이야기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하는 연출력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장훈 감독의 차기작 또한 남자 배우 두 명이 중심을 이루는 극이라고 한다. 아내는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앞으로 챙겨서 보고 싶은 영화감독 한 명이 더 생겨서 기분이 좋다’라고 말했는데, 나 역시 앞으로 그의 작품이 기대가 되는 감독이라는 점에서는 아내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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